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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천선란 - <천 개의 파랑> 줄거리 한국 SF 소설 / 천천히 달리는 연습과 행복을 쌓아가는 법

by 독자 또는 관객 2023. 8. 19.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천선란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스스로 낙마한 인공지능 로봇 기수 콜리와 안락사가 예정된 병든 말 투데이, 정해진 레일을 이탈해서 달려 나간 연재와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필요했던 은혜. 그리고 과거라는 시간에 갇혀있는 보경까지. 세상이 멋대로 재단한 '정상성'에 얽매이는 것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 채찍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친구도 가족도 동료들도 이미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앞만 보며 달리기 시작한 지 오래이다. 학생 때는 시험 점수와 석차, 등급부터 시작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연봉과 급여, 커리어, 스펙. 그리고 나이대별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시달리는 결혼이나 미래 설계, 노후 대비 등 우리들은 온갖 숫자에 둘러싸여 원치 않는 경쟁에 혹사당하고 있다. 혹여 주변을 돌아보거나 주저하는 사이 뒤쳐지거나 세상의 기준에서 탈락할 것이 두려워 불안함과 초조함을 안고 무작정 달리고 또 달리고. 영혼의 관절- 즉 마음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저 달리기만 하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잠들지 못하는 사회. 행복보다 절망과 두려움이 더 팽배한 시대. 마음이 병들어 괴로워하는 이가 너무나 많은 세상을 향해 천 개의 단어만을 가진 채 태어난 로봇 기수 '콜리'는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천 개의 파랑이 전하는 메시지는 차가운 기계를 통해 정말이지 따뜻한 마음이 담긴 위로들이라 읽는 내내 한 줄 한 줄 독서노트에 써넣을 말들이 정말 많았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허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작가의 말 중]

천 개의 파랑은 오로지 경마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기수 콜리가 파트너 투데이에게서 두 번째로 낙마하는 순간 마치 인간이 죽기 직전 주마등을 스치는 것처럼 과거의 짧은 삶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콜리는 스스로의 추락을 세상에서 가장 긴 3초라 칭한다. 콜리는 비록 로봇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삶'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는 데엔 천 개의 파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콜리가 로봇 기수로서 눈을 뜨게 됐으나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인간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하늘의 색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나 계절이 지나 바람이 차가워지고 뜨거워지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모든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며 이러한 인간적인 면은 모두 인간의 작은 실수에서 비롯되어 '기수'로서의 쓸모나 기능이 아닌 것들이 탑재되었기 때문이다. 온갖 욕망과 갈구가 철저하게 거세되었어야 할 로봇 기수 C-27은 파트너 말의 호흡을 느끼고 행복을 가늠하면서 스스로 첫 번째 낙마를 하게 된다. 스크린이 아닌 진짜 초원을 달리고 싶다고, 말을 살려야 한다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욕망을 가지고.

 

문명은 발달했고 기술은 진보하였으나 그 주체인 인간은 지구 위 모든 생명체에게 윤택한 삶을 선사하지 않았다. 인류는 뛰어난 기술을 이용하여 경주마의 속도에 이기지 못해 낙마해 사망할 위험을 가진 인간을 마침내 배제하면서 대체제 '안드로이드 기수'를 만들어냈고 이는 결국 경주마를 더 빨리 가속하게 하면서 말의 관절과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인간의 이기심과 쾌락의 도구로써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기수는 오히려 말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말을 멈추게 하기 위해, 말을 살리기 위해 비이성적이고 애정 어린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폐기처분을 앞둔 그의 앞에 소녀가 나타난다. C-27은 그저 마지막 하늘의 운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차가운 기계에 밀려 있을 자리를 잃고 사회에서 배제당했으면서도 기계가 아플 것을 걱정하고 기계를 만질 때면 행복과 열정에 휩싸이는 우연재가 나타났다. 모자의 색이 브로콜리를 닮았다는 다소 싱겁게 느껴질지도 모를, 그러나 나름 재치 있는 이유로 C-27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연재 덕에 C-27은 이제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기준은 편협하며 의미는 왜곡되어 있다. 맹렬하게 달리는 것만이 반드시 삶의 형태라 할 수는 없다. 다양하고 느리며 행복한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

책의 줄거리나 주제에 관해 다양한 리뷰들을 보았다. 혹자는 동물권이라 하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끊임없이 경쟁을 유발하는 피곤한 사회에서 쉼표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기도 했다. 혹은 기계화, 자동화되는 문명에 대한 경고라는 의견도 있었는데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 데다 콜리와 투데이가 처한 위기에서 비롯된 상황을 중점으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내용들을 이분법적으로 따로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어린 경주마 투데이. 한때 경마장의 에이스였던 투데이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달렸고 혹사당해 어린 개체임에도 관절이 모두 상해 더는 달릴 수 없어 마사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다. 콜리는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낙마하는 바람에 골반 아래의 부품이 처참하게 망가져 폐기처분을 앞두고 있었으며 연재는 장애를 가진 언니 은혜에게 부모의 관심을 모두 겼다고 생각해 소통의 창구와 마음을 닫고 살아왔고 은혜는 장애가 있단 이유로 수많은 문턱과 계단에 가로막혀 너 역시 보란 듯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소방관을 잃고 아이들을 키워내며 가졌던 꿈도 자신의 이름도 잊혀감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며 과거에 수몰되어 있던 보경까지.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그들은 낙오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패배자처럼 보이기도 해서 읽는 내내 뇌리에 '정상성'에 대한 정의가 떠오르곤 했다. 사실 정상성이라는 건 철저하게 시대와 타인이 지정해 놓은 외부적인 기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수가 적거나 목소리가 작은 것, 내가 처해본 적 없는 상황과 이외에도 다양하게 실존하는 것들에 관해 너무나 무지에 기반한 섣부른 '친절'을 베풀어버린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안락사시키는 것이 그의 행복일 것이다 라거나 장애를 가진 이에게 일방적이고도 다소 폭력적인 방식의 친절을 베풀고 이에 자아도취 하는 등의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상처를 주고 결국은 깊은 갈등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좀 더 타인에게 무관심할 필요가 있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허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p.338]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허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p.338]

작중 인물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들처럼 다 꺼져버려 사그라든 촛불의 불씨처럼 무덤덤함으로 스스로를 포장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콜리와 투데이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그리움과 슬픔을 딛고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른 경주마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아픈 관절을 삐그덕거리며 겨우 달려 나아가는 투데이를 향해 쏟아지는 관중들의 야유와 비난. 느리게 달리는 투데이의 발굽 앞에 위험천만하게 떨어지는 찌그러진 깡통에도 콜리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은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 관중석에서 보내는 야유는 중요하지 않다. 투데이가 신경 쓰지 않도록 귓가에 말하고,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관중석 한편에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는 연재와 욕을 뱉는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상스러운 욕이다... 하지만 연재와 지수가 저만큼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나는 투데이가 행복해하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투데이가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몸이 떨린다. 처음 주로에 섰을 때처럼.
'행복해하고 있군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허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p.352]

편리하고 빠른 것. 그게 나쁘단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 더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천천히 달릴 필요가 있다. 아프면 쉬어가고 힘겨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란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 역시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사람의 마음도 영혼도 모두 소모재이다. 슬픔에 닳아 해진 마음은 애정의 실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기워야 하고 일상에 지쳐 눅눅해진 마음은 따스함에 말려 뽀송하게 되돌려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그 앞에 있는 것이 길인지 낭떠러지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한 채 폭주기관차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다 고꾸라질 뿐이다. 이제는 좀 더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허블 2020